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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논리에 따라 정든 회사를 떠난 지 11개월이 다 됐다.
올해 전반기엔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창업이든,재취업이든 기회가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나름대로 역량 강화에 힘썼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지극히 어렵다는 걸 느꼈다.

사회적 체면 때문에 구직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진 않았으나, 쓸 만한 기업에선 입질이 없었다. 창업도 결코 여의치 않았다. '돈'이 보이지 않으니 섣불리 '돈'을 지를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고용해 먹여 살리고, 나도 먹고 살기가 녹록치 않음을 절감했다.

앞길이 막막하고 어둠이 언제 걷힐지 도무지 알 수 없던 차에, 지인의 제의로 지난달 '재취업 반쪽 + 내 비즈 반쪽'의 그림을 그려 마포 사무실에서 을지로3가 사무실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한 달 사이에, 베이비부머에겐 꽤 괜찮은 재입사 제안이 몇 건 들어왔다.




고민 끝에 지인의 호의적인 양해를 얻어 어느 한 곳에 재취업하기로 결심했다. 내 캐리어를 적절히 살릴 수 있고, 큰 꿈을 향해 함께 달려갈 인물이 있는 조직으로 판단해 다시 '마름'이 되기로 한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스톡홉션의 대상자가 되고, 성과급도 받을 수 있다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열심히,스마트하게 일해 볼 생각이다.

만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일할 수 있게 해 준 분이 참 고맙다. 그리고 놀랍다. 내가 그 사람의 나이와 비슷한 오너라면, 나같은 조건의 중고령 인력을 채용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훌륭한 사람을 만났으니, 그동안 열심히 쌓아온 실력을 바탕으로 회사와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Posted by A&Z
외환위기로 샐러리맨들이 파리 목숨이었던 1998년 초의 일이다. 나는 10년 선배가 떠나는 자리를 메우는 인사의 대상자가 됐다. 몸 담고 있던 신문사의 지방본부장으로 발령받아,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고향에 단신 부임했다. 가족은 분당의 한 아파트에 남아 있었다. 회사가 제공하는 방 3개 짜리 아파트에 짐을 풀고, 신문사 사인보드가 붙은 지프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이에앞서 서울을 출발해 지방본부 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에서 주재기자들을 만난 뒤, 본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엔 매일 20만 부 이상을 찍을 수 있는 공장이 지방본부 내에 있었다. 미리 도착 시간을 알리고 본부에 갔다. 공장장과 직원들, 판매지사 근무자, 식당 근무자 등 수십 명이 차렷자세로 도열해 있었다. 그런 일은 처음이라 좀 놀랐다.

며칠 지나 그 지역에 주재하는 중앙일간지의 지방본부장들과 식사를 하게 됐다. 모두들 연배가 나보다 10년 안팎 더 많았다. 그러니 그 분들과 친하게 지내기가 힘들었다. 도지사,시장 등 지역유지들과 식사를 할 때도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한 두 다리 건너면 모두 학연과 지연,그리고 관계에 얽혀 있는 만큼, 서울에서 행동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평생직장으로 생각했던 신문사가 당시엔 언제 옷을 벗어야 할지 모르는 불안의 대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신문사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모든 직장이 다 그랬다. 과연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기가 언제일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가시방석에 앉은 직장인들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풍전등화)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들어온 샐러리맨들의 그 참혹한 심정에서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전방에서 근무하다 정보를 다루는 기관으로 옮긴 고교 동기생이 찾아왔다. 그 친구도 서울에서 근무하다 나보다 좀 늦게 지방으로 발령받아 나와 같은 도시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물음을 던졌다. "야, 네가 취업시장에 내던져 졌을 경우 몸값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냐?" 난데없이 엉뚱한 질문을 받은 그 친구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 몸값이 거의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거기에 나도 동의했다. 언론기관과 정보기관에서 근무하다 내동댕이쳐친다면,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사회에서 무슨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둘 다 품고 있었던 것이다.

2년 뒤 나는 서울 본사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10년 이상을 남부 지방과 중부 지방으로 옮겨가며 일했다. 그와 서울에서 다시 만난 건 둘다 직장을 떠나기 2년 쯤 전이었다. 내 친구는 농삿꾼으로 완전 변신을 꾀하고 있다. 경매로 지방에 산 땅에 묘목을 심어 가꾸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반면 난 온라인에서 길을 찾고 있다. 신문사 그룹의 웹 2.0TF 팀장으로 오픈 소스(API)인  '미디어 위키'를 뜯어 매시업해 사이트를 2개 만들고 각종 사업을 벌이는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신문사 문화재단에서 석좌기금을 받아, 직장을 휴직하고 명문 사립대학 신방과에서 초빙교수로 1년을 보냈다. 대학 측의 배려로 젊은 교수 2명이 쓰던 연구실을 혼자 넓게 쓰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많이 읽고, 강의 준비와 학생 지도에 힘을 쏟았다. 그 시절, 난 컴퓨터학원(8개월) 과 온라인사이트를 통해 웹디자이너 과정과 웹프로그래머 과정을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아직도 실무를 직접 하진 못한다. 그게 상경계열을 나와 신문기자를 오래 한 중년의 한계다.

1998년 이후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은 한결같았다. "취업시장에 내던져진다면 네 몸값은 얼마냐? " 첫 물음을 화두처럼 던진 당시로부터 무려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만큼 몸값 평가에 불리할 건 뻔하다. 나이 탓에 재취업이 어렵다고 판단해 한동안 창업을 준비하다 '영업'이 보이지 않아 최근 시장에 나를 본격적으로 내던져 보았다. 몸값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 시각엔 엉터리 같은 회사들이 많이 접촉해 왔다. 하지만 꽤 쓸만한 회사 두 곳에서 제의를 받았다. 눈높이를 바짝 낮춰서 그런지, 내 몸값이 그런대로 괜찮음을 알았다. 비교적 많은 연봉을 꽤 오랫동안 받은 데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아직 그래도 쓸 만한 모양이다.

그건 내가 꾸준히 노력한 덕분이다. 오랜 신문기자 생활로 콘텐츠를 아는 건 기본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어림없다. 인터넷신문을 비롯한 사이트를 직접 운영할 줄 안다. 또  html+css부터 기본 프로그래밍까지 해봤다. 구글플러스(서클 회원 최대한도 5000명 달성)와 페이스북을 왕성하게 운영하고 있다. 전문 블로그인 티스토리.이글루스와 조인스 블로그(누적 방문자 411만 명) 등 블로그를 다수 운영하고 있다. 필요하다고 판단한 카페도 몇개 열어 놓았다. 그리고 다수의 트위터를 만들어 팔로어를 총 6만 5000명 확보하고 운영 중이다. 그래서 내 몸값이 그럭저럭 괜찮은 모양이다.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기지개를 크게 한 번 켜고 움직일 때다. 어려울 때 힘이 돼 준 고용보험에 감사를 드려야 겠다. 다음 주, 마지막으로 강남고용센터에 간다. 따뜻하게 대해준 담당자 두 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Posted by 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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